나는 누구인가?(3)
나는 누구인가? 성도(Saints),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오늘 그리스도의 신부
바울의 복음전도, 영혼구원사역,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어린양은 누구? 그의 신부, 아내는 바로 성도들이다.
예수 믿어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신부이다.
1)정혼식
두 사람의 혼사가 오가고 만남이 이루어지고 양자 간에 결혼하기 합의되면 정혼식을 한다.
신랑이 아버지와 함께 신부 집에 간다. 포도주와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간다.
신부와 신부가족과 함께 한 자리에서 신랑이 먼저 포도주를 마신다. 그리고 그 잔을 신부에게 건낸다, 신부가 그 잔을 받아 마시면 정혼이 성립되어진다. 일종의 언약식이다. 그 때 신랑은 준비해간 결혼지참금을 신부아버지에게 건낸다.
정혼식이 이루어지면 법적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사실상의 결혼이다.
요셉의 가정,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되었다. 성령으로...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했다.
베들레헴에서 정혼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합법적인 부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결혼은 아니다. 절차가 남아있다.
2)신혼집 준비
집으로 돌아간 신랑은 그 때부터 두 사람이 살 신혼집을 준비한다. 수리하기도 하고 짓기도 한다. 대개 6개월-1년이 걸린다. 신혼집이 마련되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으로 간다.
3)혼인예식
신혼집이 마련되면 신랑이 들러리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으로 간다.
신랑의 의복을 갖추어 입고, 횃불을 들고 행진을 한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온다는 전갈을 받은 신부 집은 잔치를 준비한다.
주로 밤중에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는데 그 때 신부의 들러리가 먼저 신랑을 맞으러 나간다.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면 잔치가 시작된다. 거의 일주일까지 잔치를 계속한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한 가정이 탄생을 한다.
이런 풍습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랑되신 예수님과 정혼한 신부이다. 아직 혼인예식을 올리기 전이지만 합법적인 부부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정혼식을 맺으시고 거처를 예비하러 아버지께로 가셨다. 때가 되면 신부인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천상에서 펼쳐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신분이 뭔가’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신분이 뭔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예수님이 나의 신랑이시다. 유대결혼풍습에서 정혼은 사실상 결혼이다. 법적으로 부부이다. 단지 혼인식을 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라 할 때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신부 삼으시고 부부의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을 먹고 산다.
사람들이 외로워하는 이유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 외롭다.
사람들이 아파하는 이유는 몸이 아파서라기보다 사랑을 받지 못해 아프고 사랑의 상처 대문에 아픈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난 아이가 제일 먼저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 뭔가? 사랑이다.
막 태어난 아이가 아직 시력이 없어서 엄마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품에 안겨 젖을 빨 때 엄마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젖을 빠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빠는 것이다. 엄마의 품에서 엄마의 사랑을 느낄 때 아기는 평안하고 행복해한다. 참된 평안이며 행복이다.
그러다가 동생이 태어난다. 아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낀다. 사랑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독차지했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김을 느낀다. 그래서 투정하고 말썽을 피운다. 안하던 짓을 하기도 하고 엄마 몰래 동생을 해하기도 한다. 아이가 못돼서가 아니다. 사랑을 빼앗기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충족된 사랑을 되돌려받고 싶어서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찬송이 있다.
사람은 사랑이 충족되어야 행복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것이 채워져도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부부관계로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신부 삼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1)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의 사랑
사랑도 다 같은 사랑이 아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느낌과 감동은 달라진다.
거리의 노숙자가 술에 취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사랑고백을 해온다면 좋으시겠나? 행복하시겠나?
나를 사랑하시는 신랑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사랑이 감동적인 것은 그분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기에 그분의 사랑에 감동하는 것이다. 성도가 행복한 이유는 그분이 나의 사랑이며 나의 신랑이기 때문이다.
여고 동창들이 모이면 관심들이 뭔가? 서로 물어보는 게 뭔가? 너거 남편 어떤 사람이고? 뭐하는 사람이고? 거기에 자존심 상하면 다음 모임에 안온다.
2)나를 신부 삼으신 사랑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신부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내가 신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랑에 의해 내가 신부로 선택을 받은 것이다.
유대인 결혼풍습에 보면 신랑이 먼저 신부 집을 방문한다. 먼저 포도주잔을 건넨다. 맘에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들만한 구석이 있는가? 특히 하나님의 아들께서 신부로 삼으시려면 뭐 이쁜 구석이 있어야...
못나고, 소가지도 못됐고, 변덕 심하고, 딴 짓하기 잘하고... 뭐가 맘에 들어서 프러포즈하신 걸까? 은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3)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
신랑 예수께서 신부인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신부를 사랑하시는 신랑의 사랑은 ‘위하여 자신을 주심’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문제는 뭘 주느냐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사랑은 ‘자신을 주신 사랑’이다.
들에서 키우는 양떼 중에 한 마리 내어준 사랑이 아니다. 금. 은. 보석도 아니다. 아파트 한 채를 내어주신 것도 아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내가 뭐라고, 우리가 뭘 했다고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사랑하시는가?
우리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10절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다. 무조건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다고 표현했다(롬 5:5).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고 고백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난 간증을 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박해하러 가던 길에서...
1)언약을 지켜라.
정혼식은 하나의 언약식이라 했다.
한 남편인 그리스도와의 언약이다. 남편이 다섯이었던 수가성의 여인과 같은 삶을 살면 안된다는 말이다. 오늘은 이 남자 내일은 저 남자 만나고 다니면 안된다...
한 남편인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그리스도께만 헌신하겠다는 언약이 정혼식이다.
이 언약을 깨뜨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야고보의 책망을 보라.
2)날마다 교제하라.
하늘나라의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언제 오신다고?
그렇다면 그 때까지 아무런 교제도 사귐도 없는가? 연락도 편지도 없는가? no
3)자기를 단장하라.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 두 가지
서로 사랑하라
복음을 전하라. 마지막 지상명령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 사랑받는 신부, 영광스러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신부이다.
언약을 지키고, 교제하며, 자기를 잘 단장하는 신부가 되어 신랑이 언제 오셔도 기쁨과 감격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