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이 무더위 가운데서도 행복하시기 바란다. 오늘 행복의 조건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조건들이 여러가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행복의 조건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있으면 편하지만 없으면 불편하지만 그것이 행복의 근본적인 조건이 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오늘 우리를 행복하게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조건이 뭔지 찾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을 읽었다. 성경의 첫 번째 구절 이 어떻게 시작하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다음 두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1)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2)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임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함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 모두는 두 줄로 세운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어디 있어? 진화지 어떻게 창조냐? 이건 거짓이며 신화일 뿐이야! 하며 성경을 내던지는 사람, 두 줄 밖에 없다. 어느 줄에 서시겠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여섯째 날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천지창조와 사람창조이다.
창 1:1-2:3까지 천지창조, 2:4-25 인간창조의 기록이다.
천지창조는 창조사역 전체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인간창조는 인간론적인 관점에서 미시적인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인간창조에 관한 부분을 읽었다. 천지 창조에 비해 인간창조는 특별하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천지창조에서부터 인간창조로 집중되고 인간창조로 마무리된다.
본문은 인간창조가 천지창조와 다른 점 두가지를 말씀한다.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흙’이란 단어 히브리어 ‘아파르’ -마른 흙, 먼지, 티끌
흙과 관련된 단어가 2:6절에도 나온다. 땅이라 번역된 ‘아다마’ -땅, 육지, 토지
‘아파르’와 ‘아다마’의 차이, ‘아파르’는 경작이 불가능한 흙인 반면에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흙이다.
다시 말하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은 경작이 불가능한 먼지와 티끌 같은 흙, 생명력이 전혀 없는 훅~하고 불면 날아가 버리는 흙으로 지음 받았다. 따라서 ‘아파르’로 지어진 이 육신 자체는 생명력이 없으며 연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허무하고 허망한 존재이다.
김광석이 부른 노래 가운데 ‘먼지가 되어’ 워낙 경건해서 이런 노래 모르나?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먼지가 되려고 애써지 않아도 원래 우리는 먼지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허무하고 허망한 존재이다.
2)살아있는 영적 존재로 지으셨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허망한 먼지같은 존재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생기)가 들어왔다. 육신의 모습 자체로는 허무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인데, 욥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란 단어와 동일시 된다(욥32:8, 33:4).
따라서 사람은 먼지와 같은 허망한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생기(하나님의 영)를 불어 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신 영을 가진 영적 존재이다. 이것이 다른 피조물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세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1)우리는 소중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다.
다른 피조물은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1:3) 생물 가축 짐승,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24)
2:7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formed” 빚어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기(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셨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영이라 했다. 하나님의 영을 주셔서 영적 존재가 되게 하셨다.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영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인간 뿐이다. 개나 원숭이 같은 지능이 좋은 짐승들이 사람과 비슷한 뇌를 가지고 있지만 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신을 찾기 위한 종교행위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반면에 인간이 살았던 어느 대륙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지전능한 신을 찾았던 흔적들이 곳곳에 무수히 남아 있다.
하나님이 영을 주셔서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람은 특별한 피조물이다. 소중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 먼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머니에게 모성애가 있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 지극한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다. 몸이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자식을 두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어머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자기가 아픈 것이 낫고, 자기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본능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모성애가 강할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는 말 안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고통의 대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존재의 분리를 의미하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처음 아기가 생기면 어머니와 아기는 탯줄을 통해 연결되어진다. 아기는 탯줄을 통해 모든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렇게 해서 아기는 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자란다. 그래서 아기는 어머니의 생명이요 어머니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아기가 몸 밖으로 나와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가 되면, 그 아기는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또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분리’ 그래서 아버지에게 없는 특별한 사랑인 모성애가 있는 것이다. 자식이 아프면 자기 몸이 아픈 것처럼 느껴지고, 자식의 인생이 망가지면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처럼 괴로운 것은 바로 이 모성애 때문이다.
그 모성애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인 사실을 아시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영)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의 생명으로 호흡하며 살고 있다. 먼지와 같은 흙으로 만든 육신만으로는 허망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육신과 함께 생명의 기운을 나눠주셨고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 안에 있던 생명을 출산하고서도 계속해서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나누어 준 인간을 계속해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모성애와 비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성도는 자신이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흙으로 돌아갈 육신만 남겨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 부어진 소중한 존재이다. 하나님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신 가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의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왜 자살하나? 나는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성도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 역시 나와 같이 창조되어진 소중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이후로 내가 나를 대하는 시각이 달라지기를... 다른 성도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지기를...
2)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도록 지음 받았다.
사람이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나의 영이 만남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만 허락되어진 놀랍고 영광스러운 축복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과 교제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이 행한 첫 번째 행위가 하나님이 두려워서 숲속에 숨었지 않았나. 그 이후 모든 인생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로 태어난다. 이것이 영적 죽음이다. 그래서 인생은 허망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단절되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하신 것이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끊어진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진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의 영이 살아났고 회복되었기에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가능해 진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과 교제는 지속되어야 한다.
3)하나님의 영과 지속적으로 접속되지 않는 인생은 허망하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가능하도록 회복되었는 ㅍ사실은 성도의 삶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허무하고 허망해질 수 밖에 없다. 왜? 우리의 육신은 본질적으로 흙으로부터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 ...
우리는 지난 5주간 동안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1)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2)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3)성령의 전, 그래서 나는 성도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 말씀 역시 우리에게 동일한 세가지를 증거하고 있다.
1)나는 존귀한 존재이다.
2)나는 하나님의 교제가 가능한 존재이다.
3)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아니고서는 이 복을 누릴 수 없다.
아무리 자녀? 탕자처럼 집을 나가 아버지와 떠나 있으면 고통이라. 아무리 신부? 성령을 모신 성전? ...
결/여러분은 존귀한 존재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이다. 왜? 하나님이 특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주셨고 하나님의 영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분신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자기 분신같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존재이다. 살아 있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나의 영이 만날 수 있고 사귈 수 있다. 예배를 통하여 만남이 이루어진다.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인생이 허무할 수 있다. 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없이는 우리 인생은 먼지이기 때문이다. 훅 불면 날아갈 수 밖에 없는 티끌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눌 때 행복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향한 목적과 사명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한 삶을 살 때 그 인생은 보람을 느끼도록 되어있다.
오늘 세가지를 기억하자.
나는 가치있는(존귀한) 인생이다.
나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나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없이는 허망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