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어찌보면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말씀이다.
학창시절 전도를 하면 늘 부딪치는 부분이었다.
“예수님 믿자” 라고 이야기 하면
“예수를 믿으면 이것 저것 하지 말아야 할 게 많이 생겨서, 부담 스러워서 싫어.”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 믿는 것은 얽매여서 사는 것 같아 보인다. 예수 안 믿는 친구들은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갈 데 안 갈데 다 가보고,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많이 얽매여 보인다.
이 말씀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자유하다는 말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예수님을 믿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많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 앞에 반문해 본다. 우리는 자유한가?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하게 되는데 이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예수님을 믿어 얽매인 삶에서 자유하게 된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누리는 삶이 되길 바란다.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은 매여 있고 묶여 있는 존재’라는 속 뜻이 담겨있다.
거기에 대해 유대인들이 33절에 반발을 한다.
노예생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고 지금은 로마 의 지배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영적 자부심이 있는데 남의 종이라니, 우리는 독립된 아부라함의 자손들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성경에선 유대인들에 대한 질책을 자주 하셨다.
그런데 유독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들에겐 달랐다.
데살로니가 의 유대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깡패를 동원해서 바울을 내어 좇았다 .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달랐다. 베뢰아에 있는 유대회당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선뜻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 다음 반응이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답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다.
성경 앞에 나아가 보니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맞구나. 구약에서 선포하신 메시야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들이 달랐던 건, 그들은 성경을 모든 판단의 절대 기준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말씀을, 진리로 결론으로 삼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고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기준 삼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31절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31절에 “믿는” 이라는 단어와 “거한다”라는 단어를 유심히 보면 발견하게 된다.
‘믿는’이라는 단어는 과거 완료형이다. 이미 일어나서 끝나 버린 일
‘거한다’라는 말은 부정 가정법이다. 이전부터 지금,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다고 고백했었습니다.” 만약 이런 과거의 믿음의 고백만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매여 있는 삶을 산다는 뜻이 숨어 있다.
자유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만 진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셨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말씀을 가끔씩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에 도움을 주는 참고서 정로도만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거짓 가치로 부터 자유할 수 없다. 자유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교과서로 삼아서 무엇을 하든 “아 이럴 땐 이렇게 하라는 구나”, “이럴 땐 이렇게 살아야 하구나” 하며 말씀을 삶의 결론이자 답으로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세상의 거짓 가치로 부터 자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설교자로 주제 설교가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 이런 설교를 하고 싶은데, 어떤 구절이 이러한 말씀을 전할까? 라고 말씀을 대할 때가 있다.
하지만 진짜 은혜는 나의 생각과 답을 가지고 나갈 때가 아닌 말씀이 나에게 이야기 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생각지도 못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 과거에 익숙한 말씀이지만 전혀 새로운 은혜로 말씀해 주신다.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거짓에 묶여서 살아간다.
세상이 거짓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아서 거짓에서 완전히 자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세상의 시작과 마지막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선포하러 오신 분을 믿는 다고 하면서 거짓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1) 하나님은 없다.
우리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거짓이다.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은 사람들, 또한 하나님을 없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아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만 보지 않으면 죄 짓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나 나와 이 세상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 행복에 대한 거짓
세상이 행복을 준다고 생각한다. 공부, 학위. 취업. 진급 전문인이 되고 정치적으로 지위를 얻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과연 많이 가지면 행복한가? 지위가 높아지면 행복한가?
세상은 그게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면 무서운 죄에는 애써 눈감는다.
우리의 삶은 사명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날마다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세상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면 완전히 거짓에 속고 있는 것이고, 비참해 진다. 교회와 목사들의 타락도 여기서 시작된다.
시험을 준비하거나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사람
지금은 불행하고 그것을 얻으면 행복해 질거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완전히 속고 있는 것이다.
* 돈에 대한 거짓
그런데 돈, 사회적 안정을
특히나 돈에 있어서, 예수님은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부자 청년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돈 보다 예수님이 좋아졌는가?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다.
돈의 소유에 앞서 돈을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길 원하신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이 같은 세상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크게 들린다.
반대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면 삭개오 같이 된다.
돈을 행복의 조건을 생각했던 그 동안의 삶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의 말씀을 들을 때.
* 결혼에 대한 거짓
좋은 남자 좋은 여자 만나면 행복해 질거다. 여기서 이 땅의 가정의 불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이미 결혼하기 전에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결혼하고 난 후에 배우자로 인해 행복해 지려 하기 때문에 평생을 싸우게 된다. 왜 날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냐고 ~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된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가정은 예수님으로 인해 가득한 행복을 흘려 보낼 때 가정 안에 행복이 가득차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행복은 예수님 안에서 얻는 것이다.
(3) 내가 누구인지를 잊게 한다.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
지난 설교를 통해 알게 된 사실 “나는 누구인가?”
성전, 성도,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신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하기에 속고 있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자유하지도 못한다. 아직도 진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면 자유해 진다.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
굉장히 무서운 거짓을 심어주었다.
어릴 적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줄 엄청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넌 다리 밑에서 주어온 아이야” 삼촌이 심각하게 놀렸다.
내 눈을 맞추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어머니의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내가 누구라는 확고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니, 삼촌의 농담에 그냥 코웃음을 쳐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은 자꾸 우리들을 뒤 흔들어 내가 누기인지를 잊게 만들고, 무언가가 되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와같은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면 세상의 어떤 가르침과 속사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만 변하지 않는 진리이고, 우선시 되고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엔 코웃음만 나오게 되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보여주신 살아가는 방법 외에는 별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모든 의심 갈등, 염려, 우리를 뒤 흔들만한 세상의 이야기들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말씀안에 거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하는 진리를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을 내가 진심으로 믿고 받아 들이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나는 모른다.
오직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본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나도 죽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도 누군지 모른 채 살아간다.
정채성에 문제가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의 성장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의 종 노릇 하면서 산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대 부분은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의 우리는 십자가에 죽었다. 이제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말씀안에 거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옛 본성을 죽었지만 그림자처럼 수시로 우리를 차지하려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다.
롬6:3~4
세례식은 장례식과 결혼식이다.
세례식을 할 때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장례식을 치룬 것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세례식은 장례식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장례식을 치룬 사람이다.
그리고 이어 나는 이제 영적으로 예수님과 영적으로 결혼했다. 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연합하여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존재이다.
이 귀한 사실은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에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에 옛 죄인의 모습으로 자유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누구인가 라고 물어 볼 때,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만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통해 우리 삶을 얽매고 있는 것들로 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의 말씀 지키는 것이 힘들다. ~ 그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선, 나를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내어 주시고, 이제는 부활 하셔서 나와 영으로 함께 하시는 그 예수님께 마음을 열라고 하신다.
3년을 좇아 다닌 교회 동기 커플…
자매가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
“내 평생 이 사람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랬더니 얼음장 같았던 마음이 열리며 누구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따를 것이라 작정한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평소에 보기만 해도 미운털 밖힌 성도도 이뻐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던 감정의 찌꺼기들로 부터 자유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주님안에 거하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모르는 사람이다.
나의 연약함에 좌절하고 있다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요. 인생에 대해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부터 해 보십시오. 관계 가운데 시험과 좌절이 있다면
다큐멘터리 ‘팔복’ 시리즈로 유명한 김우현 감독이
오늘 뭐할까요? 지금 뭐할까요? 날마다 하나님께 아뢰며 그렇게 일년을 살았더니 ~ 주님의 행하시는 일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일년 뒤에 돌이보니 자신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삶을 산 것이다.
나의 삶이 세상의 다른 어떤 가치와 가르침에 매이지 않고, 내 안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안에 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일한 진리를 알고 그 진리가 인생의 결론이 되시길 바란다.
“하나는 분명히 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