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람을 행복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깨어지고 만다. 자신들의 범죄로 인함이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먹으므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유독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금하신 이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너희는 피조물임을 인정하라. 순종하게 함으로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창조주께 순종해야 할 관계이다. 말씀에 순종할 때 너희행복은 보장된다.
아담의 범죄는 탐심도 탐심이었지만 이 관계를 깨뜨린 것이 문제였다. 창조주께 순종해야 할 관계를 무시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이 근본적인 죄였다.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불행은 시작되었다. 이 불행은 관계의 변질 내지는 깨어짐이라고 말씀드렸다. 세가지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오늘 4장의 말씀은 아담의 범죄로 시작되어진 불행이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다. 첫째가 가인, 둘째가 아벨이었다.
두 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아마 부모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형제가 같은 내용 같은 말씀으로 배웠을텐데 결과는 너무나 다르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예배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으나 형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
이유는?
몇가지 설이 있다.
1)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라... 취향이 곡식이나 풀보다는 육고기를...
2)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원하셨다. 이미 가죽옷 사건을 통하여 희생제물에 대해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부모로 배웠을 것이고 아벨은 배운대로 피의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그냥 쉽게 곡식으로... 일리는 있느나 올바른 해석은 아니다.
하나님은 육식을 즐겨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제물로 번역된 (히)‘민하’ 희생제물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일반적인 제물, 감사제물을 의미한다. 제사를 드린 시기를 보아도 수학을 끝낸 후의 제사이다. 말하자면 속죄제물(희생제물)이 아니라 감사제물이었다는 것이다. 문맥을 보아도 제물의 선택이 각자의 생업에 맞게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띠라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적어도 제물의 종류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는가?
제물의 문제라기 보다 제사를 드리는 자, 예배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으로 언급하셨다.
반면에 하나님은 본문 7절은 가인을 죄인으로 책망하신다.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보시는 것은 ‘제물이 뭐냐?’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이다. 예배를 드리러 나온 사람의 인격과 삶을 먼저 보신다는 것이다.
‘예배 때의 모습’보다 ‘예배 이전의 삶’을 먼저 보신다.
매주 우리는 두가지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의식으로서의 예배와 삶으로서의 예배이다.
의식으로서의 예배도 중요하다. 잘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특별히 참여하는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준비되어진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삶으로서의 예배가 더 중요하다. 예배 이전의 예배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배당이 중요하고 예배음악이 중요하고 예배기도가 중요하고 예배의 말씀이 중요하고 예배의 헌금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예배를 드리는 자의 신앙과 인격이 중요하다. 이것이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물어보자. 만약 아벨이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농작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하자 받으셨겠나?
가인이 양을 치는 자여서 양의 새끼로 예배했다 하자 받으셨겠나?
하나님은 아예 처음부터 가인이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너는 아니야! 너의 신앙, 너의 인격, 너의 삶을 내가 받을 수 없어!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의 신앙과 인격과 삶이 문제였다.
행복을 잃은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 뭔가?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거부하신다. 예배의 의식은 있고 형식은 있으나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사야 선지자는 정확하게 묘사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나의 신앙과 인격과 삶을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서로 돕는 배필로 주셨다
부부 사이의 행복의 필수요건은 사랑도 사랑이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배려와 섬김과 책임이다.
그런데 범죄 이후 그들의 사랑은 변질되었다. 배려하지 않았고 섬기지 않았고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로서 사랑해야 했다.
그런데 가인은 동생을 사랑하지 못했다. 족장시대를 보면 장자의 권한과 축복이 컸다. 가문을 대표했고 상속권도 두배였다. 반면에 책임도 주어졌다. 가족을 돌봐야 했다. 사랑으로 돌보고 섬겨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그런데 가인은 장자로서 형으로서의 특권과 축복은 누렸을지 모르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인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두 가지가 있다.
1)시기심이다.
남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기뻐하고 축하줘야 하는데 배가 아프다. 오히려 남이 나보다 못하고 안되고 망해야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이 변질된 사람의 인격이다. 이러한 타락하고 변질된 인격이 공동체를 위협한다.
예>수도원에서 한 사제가 몇 년째 경건훈련을 받고 있었다. 마귀가 그를 넘어뜨리려고 갖가지 방법으로 유혹한다. 그러나 넘어가지가 않는다. 마귀는 이제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사제에게 속삭였다. 당신 친구 사제가 이번에 바티칸에서 대주교가 되었다네. 그 말을 들은 사제가 화를 버럭내면서 수도원을 뛰쳐나왔다는 이야기다..
2)내적인 분노이다.
아벨은 가인에게 아무런 잘못을 한 적이 없다. 둘이 다투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대도 가인은 동생을 죽였다. 말하지만 최초의 ‘묻지마 살인’이다. 분노 때문이다. 시기심에서 시작된 내적인 분노가 아벨을 향해 폭발한 것이다.
말하자면 ‘분노조절장애’이다. 자기를 쳐다보았다고 집단구타...
지하철에서 무차별로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 화장실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여성을 칼로 찔러 죽였다. 공원에서 지나가는 여성을 폭행하고 죽이고... 면식도 없다 원한도 없다. 그냥 분노가 조절이 안되니 닥치는 대로 해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질되어진 사랑이 있을 수 있다. 시기심, 내적인 분노 있을 수 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이 잘되는 것 진심으로 축하하고 격려하는가? 시기심, 질투심, 열등감 때문에 분노를 품고 있지는 않은가? 혹 가족들 앞에서 큰소리 치고 화를 내고 심지어 집어던지고 하지는 않는가? 가정폭력이 아직도 이시대의 심각한 문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행복하신가? 하나님은 행복하도록 우리를 지으셨다. 사랑하며 섬기며 살도록 창조하셨다.ㅑI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행복은 금이 가고 말았다. 관계의 깨어짐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예배가 은혜가 안된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따라서 예배가 안되면 행복할 수 없다. 점검하라. 예배가 은혜가 되는가? 나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는가? 내가 드리는 예배가 가인의 예배인가? 아벨의 예배인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며 인격과 삶의 문제이다.
두 번째 불행의 요소는 사랑의 변질이다. 사랑이 시기심으로 변질되고 그것이 분노로 쌓이고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 점검하라. 내 안에 사랑으로 가득한지 아니면 시기와 질투와 열등감으로 가득한지, 그것이 분노의 감정으로 축적되고 있지 않은지, 그 분노가 표출됨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교회공동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는 않은지 점검하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 되시길...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셨던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