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방편이 두가지 있다. 말씀과 성찬
말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방편이라면 성찬은 눈에 보이는 은혜의 방편이다.
따라서 성도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성찬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찬이 중요한 또 한가지 이유는 주님이 제정하셨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시행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왜 주님은 성만찬을 친히 제정하시고 계속해서 시행하라 하셨을까?
복음이기 때문이다. 성찬 안에 순전한 복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방편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거행되어지는 이 성찬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 선명하고 순전한 복음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금 경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11장을 읽어보면 성찬과 다른 만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 만찬, 자기의 만찬...
주의 만찬 전에 자기의 만찬이 먼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의 만찬을 먹는 중에 문제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주의 만찬이 방해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제정하신 첫 번째 성만찬도 유월절 만찬에서 시작되었다. 유월절 만찬은 여러 번의 식사로 이어진다. 양고기, 쓴나물, 무교병, 포도주... 그 식사 끝에 예수님은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본을 따라 애찬으로 시작하여 성찬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애찬과 성찬이 선명히 구분되지 않는 듯한 말씀을 대할 수 있다.
그러다가 애찬이 성찬의 성스러움을 방해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20절 이하의 기록처럼 각자 음식들을 가져와서 함께 먹는다. 그런데 가끔 늦게 모임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온 성도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애찬을 먹는다. 대게 늦게 모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일용직이나 노예들 같은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늦게 올 뿐 아니라 음식을 가져올 형편이 못된다. 그러다 보니 늦게 오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21절의 말씀처럼 어떤 사람은 배부르고 어떤 사람은 시장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면 시장한 성도들이 마음이 상한다. 그런 상황에서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성찬식이 진행되는데 은혜가 되겠나? 사랑의 공동식사인 애찬이 성찬의 성스러움을 방해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갈수록 애찬과 성찬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애찬은 애찬대로 가지고, 성찬은 성찬대로 따로 시행했던 것이다. 약간은 소란스럽고 가벼운 애찬의 분위기 때문에 성찬의 경건함과 은혜로움이 방해받지 않게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애찬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의 공동식사인 애찬은 그 이후에도 신약교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를 통해서 성도들은 사랑의 관계를 확인했고, 섬김을 실천했다. 한 상에서 먹고 마심으로 공동체성을 견고히 했다. 나아가 믿지 않는 이웃들을 이 식사에 초대하여 영혼구원의 기회로 삼았다.
가정교회는 신약교회의 회복을 지향한다. 그래서 가정교회를 하는 교회마다 이 애찬, 사랑의 공동식사를 중요하게 여긴다. 신약교회의 전통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교회에서도 이 애찬이 행해지고 있다. 한달에 한번씩 가지는 ‘목장별 식탁교제’ 그리고 ‘목장모임의 식사’이다.
매 주 목장별로 모이는 목장모임의 식사는 중요하다. 목장모임은 식사 후에 따로 드리는 ‘소그룹 예배’(구역예배)가 아니다. 식사로부터 시작되는 공동체모임이다. 목장모임의 식사는 그냥 ‘모였으니 밥이나 먹자’가 아니라 성도들의 ‘사랑의 애찬’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식사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기기로 다짐하는 성도들이 함께 하는 ‘사랑의 공동식사’이다. 이 애찬을 통해서 사랑을 나누고 섬김을 실천한다.
따라서 이 애찬은 집에서 하루 세끼 먹는 밥과는 다르고, 밖에서 친구를 만났으니 밥이나 먹자고 하는 그런 식사와 다르다. 초대교회의 성찬전에 행했던 애찬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장모임을 모일 때는 가능하면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애찬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여건이 안되어 음식을 만들 수 없다면 김밥, 빵, 컵라면... 사가지고 와서 집에서 사랑의 애찬을 나누어야 한다. ‘목장별 식탁교제’와 ‘목장모임의 식사’를 통하여 신약교회의 애찬이 실현되어 지기를 바란다.
애찬도 은혜가 되고 중요하지만 성찬은 더 중요하다. 오늘 성찬을 통해서 우리 모두 은혜 받게 되기를 바란다. 성찬을 통해 은혜 받으려면 어떤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가?
1.감사하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념하라’는 말씀이 두 번 반복해서 기록된다.
“remember” 기억하라!
떡을 먹으면서 나를 위하여 내어주신 주님의 몸을 기억하라. 잔을 마시면서 주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을 기억하라. 무슨 말씀인가? 나를 위한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있다. 자녀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무슨 의미? 감사하라. 갚아라 보다 감사하라.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의 첫 번째 자세는 감사이다. 성찬이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2.회개하며
27절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신다. 무슨 의미인가? 28절 자신을 살피지 않고 먹고 마신다. 그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자신을 살피라! 나의 삶에 성도답지 못한 모습이 없는가? 성찬에 참여하기에 부끄러운 모습은 없는가? 내 마음과 삶을 살펴라.
이런 질문? 그렇다면 성찬은 죄를 안지은 사람만 참여해야 하는가?
그것이 성찬에 참여하는 조건이며 기준이라면 누구도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회개하고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보혈로 씻음받고 참여하라.
3.하나되기를 다짐하며
성도는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자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 구원받은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한몸인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고 우리를 한 몸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다투고 분쟁하며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어떻게 성찬이 될 수 있겠나?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기에 함당한 성도는 분쟁이나 다툼이 없어야 한다. 마음속에 미움과 시기가 없어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불편한 관계가 있거든 ....
4.이 복음 전하기로 결단하며
성찬은 복음이라 했다. 가장 순전하고 확실한 복음이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과 마음가짐으로 성찬에 참여하면 복음에 감동한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그러면서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이 있다. 우리 아버지도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행복했으면... 우리 아들도 이 복음을 듣고 행복했으면... 우리 동생도, 내 친구도...
그래서 말씀 하셨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라”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십자가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
죄사함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의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
그래서 오늘도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시며 다짐한다.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주의 십자가 전하리” “땅 끝까지 이 복음 전하리”
오늘의 성찬이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감사하며, 회개하며, 하나되기를 다짐하며, 복음을 전하기로 결단하며 이 성찬에 참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