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당시 로마는 전 세계의 수도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지였다. 로마제국의 황제는 당대 최고의 권력과 영화를 누렸고, 백성들로부터 신으로 숭배받았다.
그 로마에 기독교인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 가운데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오순절날 성령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는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렇게해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는 가정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로마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 가정교회로 모이면서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신앙이 자라기 시작한다. 그들은 한분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고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왕임을 고백했다. 그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로마황제의 귀에 들렸다. 기독교인들은 온 백성의 신으로 숭배받는 황제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아닌 자기들만의 다른 왕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왕이 바로 예수다. 세상의 유일한 황제였고 신이었던 로마황제는 기독교인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황제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을 모로리 잡아들이라” “온 세상의 최고의 왕은 로마의 황제인데, 다른 왕이 있다하며 그 왕께 순종한다며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는데, 당장 잡아들이라”
그때부터 로마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고난 받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는 아침마다 황제가 있는 황궁을 향하여 참배를 하도록 강요했고, 황제숭배를 거역하는 성도들은 잡혀 옥살이를 했다. 핍박의 강도는 점점 더해갔고 성도들은 노예로 검투사로 팔려갔다. 끝까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성도들은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나무에 매달아 화형을 시켰다.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어 굶주린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그로인해 로마의 성도들은 박해로 인하여 더 이상 지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것이 카타콤이란 지하교회(지하무덤)가 되었다. 이후 성도들은 약300년 동안을 지하에 숨어 지내면서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비참한 고난이었다.
그러나 3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로마교회는 핍박과 고난을 이기고 로마를 정복했다. 로마의 황실이 복음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복음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어쩌면 예수믿는다는 것이 당시에는 부끄러운 것일 수 있었다. 그리스 사람은 철학을 연구하는 지혜자들이었다. 로마인들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력에 있어서 최상의 풍요와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은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하토굴로 파고든 성도들에게 복음은 부끄러운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복음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뭣 때문인가? 단순한 여행을 위해서인가?
당시 로마시민들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최고의 특권과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복음이 아니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로마는 바울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땅 끝으로 불리우는 서쪽에 있었고 거리도 가장 멀고 험했다. 그런데도 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도 복음전하기 원하였을까? 복음의 능력 때문이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는 성도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복음의 능력이 땅 끝까지 나아가도록 한 것이다.
오늘도 이 복음의 능력을 아는 성도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 복음을 듣지 못하여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도하자고 말하기 전에 이 복음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을 내가 먼저 체험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은 능력인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의 능력을 세가지로 설명하겠다.
복음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 앞에 상당히 기분상해한다. 그래도 나는 선하게 산다고 살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내 삶은 그래도 고상한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죄인이 아니라, 나라의 법을 어기거나 남을 해쳐서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말이다. 믿지 않는 것, 순종하지 않는 것,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것이 죄이다.
이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노력한다고? 씻는다고?
복음의 능력은 예수 믿음으로 형벌받을 죄인이 죄사함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바울은 이 죄사함을 죄가 가리워지는 것으로 설명했다.
복음의 능력은 단순히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와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죄인의 불행은 죄를 짓고 죄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 때문에 불행이지만 더 나아가 죄의 영향력 때문에 불행이다. 죄가 있고 죄를 조장하는 사탄이 있다. 이 두가지가 지속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심지어 예수 믿고 나서도 이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방해한다.
죄인되었던 우리의 삶의 특징들을 5가지...
1)죄 가운데 행하였다. (2절)
2)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 (2절) -전통종교들과 관습들, 타락한 문화들...
3)사탄을 따랐다. (2절)
4)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였다. (3절)
5)본질상 진노의 자녀. (3절)
이 모든 속박과 저주로부터 자유한다. 죄와 사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다. 허물과 죄로 죽었고, 영 죽어야 할 저주부터부터 자유한다.
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라.
중요하다. 단순히 구원이 의롭다함을 얻는 상태, 죄가 가리워지고 신분이 달라지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떻게 구원받은 성도가 죄와 사탄의 속박과 저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롬7장에서 바울은 구원받은 내가 내 영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자신을 보면서 한탄한다.
그러나 8장에서 바울은 해방과 승리를 선포한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하여 육신을 따라 살 수 없음을 증거한다. 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게 한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말씀)을 따라 살게 한다.
더 이상 죄와 사탄의 올무과 속박과 저주아래 살지 않게 한다.
불과 130년전 주님의 사랑을 품고 찾아왔던 미국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을 소개한다.
척박하고 미개한 조선, 폐쇄적인 조선 사람들을 대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는 땅에 저를 옮겨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사실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두움뿐입니다.
어둠과 가난,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사람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정의 내심도 알 길이 없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은 영영 볼 길이 없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순종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이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것이고,
하늘나라 한 백성인 것을 알고 기뻐할 날이 올 것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의원도 없고,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 있는 이 땅이
이제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