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뭐가 좋아?"
"그리스도인이 되면 뭐가 좋아?"
그냥 식상한 이야기 말고, 자신에게 다시 물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은 인생이 되어 보니,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대답이지만, 무엇보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무엇을 누리며 살아가는지 깨닫고 사는 인생은 풍성하며 넉넉한 인생이 될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이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누리기를 기도하는 말씀이다.
기도의 내용에 앞서 골로새교회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로새라는 도시의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골로새라는 도시는 주후 60~64년 경에 발생한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땅 속에 파 뭍혔고, 아직까지 발굴되지 못한 도시이다. 지금 가 보면 달랑 '골로새'라는 이정표 하나만 땅에 박혀 있다.
그래서 그 도시의 상황을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대신에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알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골로새 교인들의 상황을 듣고 쓴 이 서신을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그대로 읽게 하라고 전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전한 서신도 골로새 교인들이 그대로 받아 읽기를 권한다.
즉,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계시록 3장을 통해 살펴보는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
엄청 부유한 도시, 현금 보유량과 거래량이 엄청난 상업 도시이다.
그 시대 현금인 금화에는 한면엔 로마 황제의 얼굴, 한면에는 로마군대를 상징하는 창과 방패가 그려져 있었다.
그들의 부유함이 힘과 능력이라는 생각을 모든 도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 땅에 자랑할 것이 너무 많은 삶.
이 땅에 의지할 것이 너무 많은 성도들.
이 땅에 자랑할 것이 많은 것이 왜 문제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부유함, 진정한 자랑을 전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이건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서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다.
즉,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어떤 유익을 얻게 될 까?
누군가에게 감사해 본적이 있는가?
쌍둥이에게 감사한 적이 있다. 빨리 잠들어 줄 때,
나와 아내에게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의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사할 때는,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감사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감사하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해 준 것이 있어서 감사함을 전한 것이 아니다.
3절에서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그 이유에 대해 4~6절에서 말한다.
사도바울과 디모데가 감사한 이유는 골로새교인들이 살아가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가?
저는 요즘 사역이 참 재미 있다.
제가 청년의 때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고백을, 이제 이 청년들의 입에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나라의 법들을 이야기 할 때 함께 아멘이라고 함께 고백하며 복음의 능력 앞에 함께 무릎 꿇는 감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의 삶 에 참여하시는 분들을 볼 때 얼마나 어여쁜지 모른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더 알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안에 말씀이 역사할 때, 인간이 느끼는 오감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말씀을 하나님의 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하신 감사이다.
사도 바울이 누렸던 감사함도 이와 같다.
지체를 사랑하자. 서로 높이자. 서로 격려하자. 우리는 자주 외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주의 법을 사모하며 좇아 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다. 내 안에서 일하신 복음의 역사가, 그 지체 안에서 역사함을 바라 볼 때,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 없다. 그토록 소중한 사람이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주의 법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복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먼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게 된 사람으로 ~ 골로새 교인들을 초대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세상 속에서 구별된 빛 가운데 거하여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구별되어 살아가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구별된 삶이 얼마나 매력있길레 ~ "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살지 않다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고 삶이 바뀐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지 또한 돌아보자.
골로새의 어느 가정에서 교회로 모인 그들에게 심부름꾼 한명이 도착한다. 누군가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도 바울의 편지를 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편지를 들고 온 사람이, 오네시모라는 사람이다. 그는 골로새 사람들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골로새에서 도망친 노예였다. 그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 편지를 받아보는 이 곳에 모인 자들 중 '빌레몬'이라는 교회 지도자였다. 도망친 주인이 있는 곳에, 그것도 모두가 기다렸던 사도 바울의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로마법에 따르면 도망친 종 오네시모에게 그 어떤 가혹한 형벌, 심지어 사형까지도 시킬 수 있었지만 오네시모는 제 발로 주인을 찾아 온 것이다.
무언가 두려워서 도망 친 종이, 죽음 마저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 왔다.
무엇이 이토록 한 사람을 변화 시켰을까?
오늘 함께 본 말씀의 끝자락에 그 이유가 나와있다.
빌레몬의 돈을 훔치고 달아나다 바울을 만났고, 그곳에서 복음을 듣게 되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이 땅에 매여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창세전에 나를 택하셔서 자녀 삼으신 것.
하나님이 알든지 모르든지 주목하여 택하셨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택하셨을까? 무슨 기준으로 택하셨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택하셨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깨달으면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열등감, 사라진다. '나를 약하기 때문에 택하셨다' 자랑 할 것이 없지만 감사 밖에 드릴 것이 없다.
우리 '오네시모'가 바뀌었어요.
주인인 빌레몬이 아직 용서해 주지 않았다. 그의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분명히 변하였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골로새 교회의 "도망자"에서 "동역자"가 되었다. 몰래 도망을 치던 사람이 어찌, 당당히 돌아오게 되었나? 오네시모의 당당함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도바울 또한 오네시모가 죽지 않을 거란 믿음을 가지게 된다.
신령한 하늘의 복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좇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택하시고 죄를 사하신 은혜를 경험하고, 이제부터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도바울이 오네시모의 변화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 골로새의 빌레몬에게 특별히 한통의 편지를 더 썼다.
13절 "내 복음을 위하여…"
사도바울이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은 오네시모를 불렀다. 같이 복음 전하는 일에 동참하자고, 그리고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오네시모는
"네, 제가 복음을 믿기는 믿겠는데, 아직 골로새 교회와의 관계도 해결되지 않아 껄끄럽고, 만약 제가 가면 살아 남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건 좀 어렵겠습니다" 라고 회피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자신을 바꾼 복음의 능력을 알았다.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복음이 하나님의 백성안의 벽을 무너뜨리는 경험을 또한 한 것이다.
골로새 교회의 용서를 넘어 복음의 통로로 사용되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눈 앞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직접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 안에서 거하며 살아가기를 말씀으로 초대한다.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은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기술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시길 간구한다.
"먼저 나의 지혜와 총명이 비어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내 뜻대로, 세상의 방법대로 지혜와 총명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길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좇아 하루를 살아가게 하신다. 그리하면 우리 가운데 일어날 일이 있다.
범사에 기쁨이 있다. 모든 선한일에 열매를 맺는다.
영광의 능력을 경험한다. 오래 참음을 경험케 하신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좋을까?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가 마음에 있다는 말은, 항상 그 사람을 생각하며 산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 예수의 이름을 믿게 된 자들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는 삶은 복음이 능력이 됨을 믿는 삶이다. 복음이 향해 가는 곳은 복음이 그 사람을 그 곳을 변화 시킨다는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방법에 이끌려 가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의 가장 훌륭한 나침반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우리 삶을 채워 갈 때 온전한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